1. 서론
인공지능(AI)은 의료 산업 전반에 걸쳐 혁신을 일으키고 있으며, 특히 신약 개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AI는 기존의 신약 개발 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정밀하게 후보 물질을 찾아내고, 약물의 효능과 부작용을 예측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 덕분에 신약 개발의 초기 단계에서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AI가 개발한 약물이 실제 임상시험을 통과하고 상용화되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본 글에서는 AI 기반 신약 개발의 원리와 장점, 임상시험에서 직면하는 도전 과제, 그리고 실제 성공 사례를 통해 그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2. AI가 신약 개발을 어떻게 혁신하고 있는가
기존의 신약 개발은 평균 10~15년이 소요되고, 수천억 원의 비용이 들어가며, 성공률도 매우 낮다. 전체 후보 물질 중 실제로 상용화되는 약물은 5% 미만에 불과하다. AI는 이러한 비효율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AI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신약 개발을 돕는다:
- 데이터 기반 약물 후보 발굴: 방대한 생물학적, 화학적 데이터와 논문, 특허 등을 학습하여 효과적인 약물 후보를 찾아낸다.
- 약물-표적 상호작용 예측: AI는 특정 질병과 관련된 단백질 표적에 어떤 화합물이 결합할 가능성이 높은지를 예측한다.
- 약물 재창출(drug repurposing): 기존에 다른 질병에 쓰이던 약물의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탐색하여 개발 기간을 단축한다.
- 부작용 예측: 약물의 잠재적 부작용을 사전에 예측하여 개발 실패 가능성을 줄인다.
이러한 기능 덕분에 AI는 신약 개발 초기 단계인 약물 탐색(discovery)과 전임상(pre-clinical) 단계에서 특히 강력한 도구로 사용된다.
3. AI 기반 신약, 임상시험에서 부딪히는 현실
AI가 개발한 신약 후보 물질이 실제 사람에게 투여되는 임상시험에 돌입하면서는 여러 도전에 직면한다. 다음은 AI 신약이 임상시험에서 마주치는 주요 난관이다:
3.1 생물학적 복잡성
AI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약물 반응을 예측하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시스템은 매우 복잡하다. AI가 예측한 기전이 실제 사람의 체내에서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인체는 유전적, 환경적, 생활습관적인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매우 정교한 시스템으로, 동물 실험이나 셀라인 실험에서는 효과가 있었던 약물이 사람에게는 전혀 효과를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AI의 예측은 통계적 상관관계에 기반하므로, 생체 내에서 일어나는 실제 메커니즘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면역 반응, 대사 경로, 약물 상호작용 등은 데이터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변수들이다.
3.2 데이터 편향과 일반화 문제
AI는 학습 데이터에 크게 의존한다. 만약 AI가 특정 인종, 성별, 연령대 중심의 데이터를 학습했다면, 그 결과는 표본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환자군에게는 부정확할 수 있다. 이는 실제 임상시험에서 부작용이나 치료 효과가 예측과 다르게 나타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임상 데이터가 서구권 백인 남성 중심이라면, 동양인이나 여성, 고령층에게 적용했을 때 예측이 빗나갈 수 있다. 이 같은 데이터 편향은 단순한 예측 오류를 넘어서, 신약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규제 당국이나 임상 윤리 위원회에서 AI 기반 신약의 신뢰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3.3 임상 프로토콜 설계와 규제
AI가 만든 후보 약물도 기존 신약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임상시험 과정을 따라야 한다. 임상시험은 일반적으로 1상(안전성 확인), 2상(효과성 탐색), 3상(대규모 효과 및 부작용 평가)으로 구성되며, 각 단계에서 수많은 절차와 규제가 존재한다. AI가 예측한 후보 물질이 아무리 유망하더라도, 인체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검토, 피험자 동의 절차, 위약군 설정, 중간 평가 등의 기준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AI 기술이 신속하게 약물 후보를 도출했더라도, 이 후보를 실제 시험 환경에 맞게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에는 여전히 전통적이고 시간이 많이 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AI 기반 후보가 전례 없는 새로운 메커니즘일 경우, 기존 임상시험 설계 틀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워 추가적인 논의와 조정이 필요하다.
3.4 규제 당국의 신뢰 부족
AI가 약물 후보를 어떻게 도출했는지, 그 과정이 설명 가능하지 않을 경우, 규제 당국은 승인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특히 딥러닝과 같은 '블랙박스' 모델은 그 예측의 근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약물 작용 기전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규제 기관이 안전성과 효능을 입증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다. 또한, AI가 새로운 약물 후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데이터의 출처나 품질, 데이터 처리 방식에 대한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규제 기관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AI의 기술력 그 자체보다도, 기술을 설명하고 검증할 수 있는 투명성, 추적 가능성, 재현 가능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향후에는 규제기관과 AI 개발자 간의 긴밀한 협력과 함께, AI 기반 신약개발에 특화된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할 것이다.
4. 실제 사례 분석: AI 기반 신약의 가능성과 한계
4.1 성공 사례: 엑스사이언티아(Exscientia)
영국의 AI 신약 개발 기업 엑스사이언티아는 AI를 이용해 불과 12개월 만에 정신질환 치료 후보 약물을 개발하고, 이를 일본 제약사와 함께 임상 1상에 진입시켰다. 기존의 신약 개발 기간이 평균 4~5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혁신적인 결과다.
4.2 실패 사례: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
또 다른 AI 기반 제약 스타트업인 인실리코 메디슨은 초기에는 빠른 후보물질 도출에 성공했지만, 전임상 시험에서 예측과 다른 독성 반응이 나타나 임상 진입에 실패한 사례도 존재한다. 이는 AI의 예측이 반드시 실체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5. 결론
AI는 신약 개발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개발 비용을 절감하는 데 분명한 강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이 실제 환자에게 투여되는 임상시험 단계에 도달했을 때는 여전히 생물학적 복잡성과 현실적인 절차, 윤리적 고려, 규제 장벽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재까지는 AI가 신약 개발의 초기 단계에서 유용한 도구임이 입증되었으나, 임상시험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AI의 설명 가능성 강화, 생물학적 타당성 검증, 규제기관과의 협력 강화 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AI의 기술력을 단순히 개발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임상시험과 상용화 단계까지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이어지도록 연결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AI는 제약 산업에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